image/bullet07_violet.gif 빛을 남긴 여인 - 리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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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와 정절로 단장한 여인 - 리브가

 창세기에는 유명한 네 족장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은 그들 네 인물의  생애를 조명해 보이는데 있어 각각 강조점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 소명과 믿음이, 이삭의 경우에는 그 결혼과  순종이, 야곱의 경우에는 그 포부와 그로인한 고난이 그리고 요셉의 경우에는 그  주어진 꿈과 그 실현과정으로서의 연단이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인생여정을 그대로 펼쳐 놓은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들 네  인물들에 관한 기사를 각별한 친근감을 가지고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상고하고자 하는 여인 리브가는 그 중 두  번째 족장인 이삭의 아내이자 세 번째 족장인 야곱의 모친으로 이름을 남긴 여인으로서  그 인품과 삶으로 그 두 족장들의 생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결혼, 출산, 자녀교육, 고부관계, 쓸쓸한 말년 등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여자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  안에서의 가능성과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약 5:17).  그러면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그녀의 생애를 기록하신 성령님의 목적을 따라(롬 15:4), 리브가에 관한 기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창 24:24).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로서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을 멀찍히나마 선망하고 동경할 수 있는 은혜에 참여함을 얻었습니다. 그 조부되는 나홀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부르심이 있을 때 그 형(아브라함) 및 아비(데라)와 달리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듯합니다(창 11:31,32; 행 7:2∼4). 그러나  그 후로 그는 그 형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 아마도 형을 좇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나홀은 약속도, 소망도 없는 이 땅에서 참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는 축복을 누렸으며(엡 2:12). 이에 자기  허리에서 나온 자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리브가는 그러한 실낱같은 은혜의  줄기에 접붙임되는 특권을  얻은 것인데, 그  특권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선물로서 그것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는데 있는 것입니다(롬 9: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입은 은혜는 어떠한지요! 이 해뜨는 곳 동쪽 끝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조그만  반도 땅의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복음의  빛이 비취었습니다(사 9:2).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에게 먼저 복음이 들려지고, 또한 그 복음에 반응하도록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게다가 복음으로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주님을 예배하고 증거하는  교회의 진리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라는 리브가의 증거는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의 자기고백이며, 그것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데 만족한 가나인 여인의 겸비한 자세를 생각나게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1∼28). 모름지기 우리는 우리의 이방인으로서의 본래의 가련한  출신과, 그러한 우리를 기억하사 복음의 사자들을 이 땅 끝까지 보내어 우리로 믿음의 선진들과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와 사랑을 늘 잊지 않고 겸비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엡 2:11∼13, 19:; 벧후 1:1; 히 12:1,2; 롬 11:21,22).

   2. 이삭의 아내

신구약 성경을 망라해서 리브가 만큼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성경의 무대에 등장하는 여인은 없다 하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결혼의 이상적인 모형을 제시하고자 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순결무구한 신부로 그 첫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의 출현은 은은한 축혼곡의 연주에  맞춰 신랑을 향해 조심스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기며 그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는 신부의 입장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면, 과연 그녀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시선을 끌어 그러한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성경의 무대에 등장하게 했는지를 창세기 24장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경은 그녀가 몸과 마음의 순결을 잘 보존한 처녀임을 보여줍니다. "그  소녀는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16절). 신부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순결에 있습니다. 아무리 용모와  재능과 집안배경이 빼어나도 순결을  잘 관리하지 못한 여인은 사려깊은 남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라는 표현은  특별히 육체적인 순결을 가리키는데, 이는  육체의 순결과 정신의 순결이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해 줍니다.  오늘날 세상은 '몸은 줘도  마음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자기방임적인 논리를 허용하여 순결에 관한 인식을 약화시켜 도덕적인 문란을 조장하고 결과적으로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도덕적 기초와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순결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경우를 들어,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경고의 나팔을 분명히 울리면서 거듭거듭 일깨워 줍니다(잠 5:15∼20; 6:23∼35; 7:6∼23;  고전 6:15∼20; 7:1,2; 살전 4:3∼8; 딤전 2:9,15; 딤후 2:22; 히 13:4). 만일 리브가가 그 주변의 이방여인들과 어울려 뭇 사내들과 사귀며 몸과 마음을  함부로 다뤘다면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라고 한 바로 앞의 기록이 무색하게  되었을 것인데(16절), 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잠 11:22). 리브가는 오늘날처럼 도덕적으로 문란한  이방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늘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기에 힘썼으며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결한 신부로 설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리브가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했습니다.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급히…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18∼20절). 순결이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가리킨다면 이같은 친절은 다른 사람에  대한 너그럽고 사려깊은 태도를  가리킵니다. 리브가는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면서 실상 "그 몸에 쓸 것은 주지   않는"행함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약 2:14∼18;  요일 3:17,18). 그녀는 낯선 노인의 청을 외면하는  대신 마치 그 일을 위해  우물에 온양 노인의 부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급히"물을 드렸습니다. 그녀의 섬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물을  마시는 동안 그녀의  눈에 또다른 필요가  보였으며 이에 그녀는 또 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급히" 수고의 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그러한 섬김의 일에 얼마나 익숙해 있었는가를 보여주며, 나아가서 그녀의 너그러운 마음씀씀이, 원만한 대인관계, 가정생활에의  충실함, 부지런함, 어른에 대한 공경심, 헌신적인 삶의 자세 등등의 빛나는  자질들을 엿보게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그녀의 그러한 민첩하고  헌신적인 봉사의 움직임을 어떤 감화 가운데 "묵묵히 주목"했겠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2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소의 삶의 모습을 묵묵히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소유, 우리의 자랑, 우리의 명성, 우리의 배부름, 우리의 안락 등을 구하는데 분주한 것이 우리의 평소 모습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갈증, 다른 사람의 굶주림, 다른 사람의 빈곤함, 다른 사람의 불편을 채우는데  분주한 것이 우리의  평소의 모습인지, 리브가는  그 평소 모습을 통해 그 인품과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존귀를 얻고 또 그 보상으로 사라에 이어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는 영예를 누린 것입니다(히 13:1,2; 마 10:40∼42; 창 24:60).

셋째로 리브가는 자기 인생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을 소유했습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58절).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책임있게 관리해 왔음을  의미합니다. 가족들과 이웃, 친구들에 둘러싸여 삶을 공유하는 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보호와 공급 아래 영위되는 의존적인 생활 후에는 부모를 떠나 남편과 더불어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 독립적인 생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 대비해 왔던 것입니다. 그녀의 앞에는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길고도 험난한  인생이 있었으며, 이제 이 낯선  노인의 방문은 그러한 인생 앞에서의 그녀의  신중하고도 분명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중대한  결단의 순간들이 있는바,  그러한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누군가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사람을 찾느라 번민하는 대신 미지의 앞날들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확실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연한 모습은 주어진 하루 하루의 삶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임있게 관리함으로써 차근차근 장래를 맞을 준비를 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용기요 지혜인 것입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그리고 끝으로 리브가는 여성으로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미(美)를 지녔습니다.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65절). 여성의 아름다움은 드러내는데 있기보다는 가리우는데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처음 대하는 리브가의 이 모습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여인의 이성(異性) 앞에서 느끼는 본능적인 움츠림과 수줍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생면부지의 남편 앞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와 품위를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자기과시를 통한 미(美)의 표출을 표방하며 보다 개성적이고 대담한 자기표현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도시로 진출하며 자기만족과 자기추구와 자기표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정이니,  자녀니, 교육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은 그저  도덕가들이 설치해 놓은 거추장스런  장애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및 목적을 이탈한 자기파멸의 탐닉이며, 이미 그들은 그 응당한 대가로 공허함과 외로움과 무감각과 무지함과 상실함에 허덕이고 있습니다(엡 4:17∼19; 롬 1:28).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여인들은 그러한 부추김에 넘어가지 않고 꿋꿋하게 염치와 정절로 자신을 단장함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거룩한 미(美)를 보존하고 가꿔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아름답게 가꿔온 한 여인을 신부로 맞이한 이삭은 얼마나  큰 복을 누린 자인지요!(62∼67절; 잠 18:22; 19:14).

   3. 20년간의 불임(不姙)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60세이었더라"(창 25:20,26).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생애에서 찾아볼수 있는 한가지 공통점은 그 아내들이  한결같이 불임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창 16:1; 25:21; 29:31). 그들은 결혼 후에 찾아올 '당연한' 선물을 오랜 동안의 기다림과 기도 끝에  힘겹게 얻어야 했습니다.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던 것에서 그 권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양도하기 위한 뼈저린 훈련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지만 그렇게 하는데는  그분의 정한 시간과 방법이 있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리브가는 조용하고 자상한 남편의 깊은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그 인내의  기간을 잘 감내한 것처럼 보입니다.  20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면서 그들 부부간에 자녀로  인해 야기되었을 법한 불협화음이나 갈등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과 순종의 관계 속에서 부부의 예와 도리에 충실했음을 보여줍니다.

   4. 쌍둥이 출산과 편애(偏愛)(1)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창 25:24). 오랫동안 바라던  자녀의 출생과 함께 그들 부부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성격적으로 다소  대조적이던 이들 부부의 관계가 보다 철저히 대조적인  성품의 쌍둥이의 출현과 더불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그 동안은 자녀를  기다리는 것외에 이렇다  할 갈등요인이 없던 이들에게 전혀 생각지 못한 과제가 부여되었으며, 이에 그들은 그들의 결혼생활의 성숙도를 재점검하며 주어진 상황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그들이 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성격과 생활 면에서  완전히 대조적인 성향을 나타냈으며,  그같은 경향에 대해 이들 부부는 어떻게 할바를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상황에 이끌려 육신의 성향대로 반응하고 말았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 25:28). 이것은 그들이  부부생활과 자녀교육에 있어서 정상적인 안목과 푯대를 잃고  단지 아들들의 기호와 취향을 따라 육정(肉情)이 끄는 대로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두 아들의 개성과 장단점을 파악하고 둘 사이에 알력과 다툼이 없이 각각의 적성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위치에 있되  그러한 양육과정에서 일어날지 모를 그들 부모 자신의 편애성향을 경계해야 했으나 그 일에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교육자로서 공동 보조를 맞추는 대신 피교육생이 교육과정에서 나타내는 미성숙한 반응들에 마음이 끌려  교육의 목표와 원칙을 잊어버린채  교단을 슬그머니 내려와서는 학생들과 더불어 편을 가르고 나눠선 입장이 돼버린 것입니다. 이들 부부의 이같은 편애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원인을 살펴볼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자아와 이기심의 지배를 받도록 그들의 속사람을 방치해 둔데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는 갖추었으나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한 안목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자녀를 달라는 간구는 올렸으나(창 25:21) 그 자녀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지혜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그 유명한 사사의  부친이 남긴 본을 따라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여호와께  여쭈어보아야  했습니다(삿 13:8,12). 리브가가 잉태를 할 때부터 그녀가 쌍둥이를 잉태한 것과 그  아이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과, 또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기이한 관계를 이룰 것 등 그 자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미리 알리심으로 적절한 대비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각별한 배려를 하셨건만(창 25:21∼23) 그들은 불행히도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채 상황에 끌려갔습니다.

리브가는 특히 그러한 자녀에 대한 계시를 직접받은  사람으로서 책임이 더 컸습니다. 이후의 상황진전(특히, 이삭이 에서에게 스스럼없이 장자의 축복을 내리려 했던 일)을 보면 리브가가 그 계시를 남편 이삭에게  알리지 조차 않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마저 듭니다.

   5. 쌍둥이 출산과 편애(偏愛)(2)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 25:28).

이삭과 리브가가 편애의 덫에 걸린 것은 고의적인  과오라기 보다는 연약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즉, 적대감과 반목과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편을 가르고 나눠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대하는  일을 멀리함으로 초래된 영적인 둔감으로 인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당면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성격적으로 대조를 이루었기에(이삭은 조용하고 사색적인 내성적인 성품의 소유자인 반면 리브가는 활달하고 진취적인 외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보입니다.) 그 반대성향을 찾아가는 본성의 흐름을 따라  자연 이삭은 외향적인 에서에게로,  그리고 리브가는 내성적인 야곱에게로 각기  마음이 끌린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들의 과오에는 동정 내지 이해할 만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성경은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선언합니다(마 18:7). 즉, 이삭과 리브가의 과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모두가 쉽게 범할 수 있는 연약으로 이해할 만 하기도  했으나 그러나 그로인해 그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책임을 면제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의 이면에는 나태함과 교만이라는 두 가지 독소(毒素)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른데로 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즉, 그들은 소극적인 면에서는 육신의 안일에 젖어 영적인 긴장감이 느슨해질대로 느슨해졌으며, 적극적인 면에서는 그들  자신의 얄퍅한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면서 점차 하나님을 그들의 삶의  중심자리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한 그들의 삶에는 점차 어두움이 드리웠고  이윽고 쌍둥이 자녀의 출생과 더불어 불행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우리로 다음과 같은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마음 깊이 되새기게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눅 21:34).

   6. 축복 탈취의 중개자(仲介者)

리브가의 생애를 상고함에 있어 우리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녀를 향한 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그녀가 점점  하락된 위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창세기 24장에서 그녀가  취한 위치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순결한 신부였습니다(엡  5:28). 그러나 25장에 와서 그녀는 그 이기적인 본성에 종노릇하는 뭇 여인 중  한 사람의 위치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여기 27장에 와서는 하나님이  뜻하시고 이루실 일을 자신의 꾀로  처리하는 대담무쌍하고 용의 주도적인 야심가의 위치로까지 전락합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우리는, 그녀의 활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민첩하고 치밀하게 움직이는  리브가의 활약상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남편 이삭이 세상을 떠날 날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맏아들 에서를 불러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먹고 마음껏 축복하게 하라고 그를 사냥하러 보내었습니다. 득의양양한 에서가 전통과 활을 둘러매고 들로 나갔습니다. 천재일우로 그 부자간의 얘기를 엿들은 리브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신들 달리 방도가 있었을까요? 이야기가 여기쯤 이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리브가에게 성원의  갈채를 보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약 1:20). 표면적으로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갔으므로 리브가의  계략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사용된 듯 보이지만, 그러나 이 창세기 27장 본문 전체에는 사람의  눈흘김, 사람의 간계한 미소, 사람의 분주한 발길, 사람의 들끓는 감정, 사람의 불끈 쥔 주먹만 보일 뿐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사려깊으심, 하나님의 오래참으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너그러우심, 하나님의 깨끗하심  등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어찌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 처사라 할 수 있습니까?  다만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을 더디  믿는 인간의 연약을 적나라이 드러낼  뿐이며, 인간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드러낼 뿐입니다! 사람은 조급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리브가의 계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는커녕 보충적인 요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마음의  어떠함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녀는 이삭과 에서의 얘기를 엿들은 후에  그 일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 직접하신  약속에 대해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자 하셨습니다. 그녀가 그녀의 시부 아브라함의 본을 좇아(창 22:1∼19) 곡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신뢰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때는  다름아닌 리브가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찾고자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을 베푸시기 위해 그리하십니다(대하 16:9).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 이삭을 통해 전수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다음 세대인 야곱에게 물려 줄 역사적 사명을 이행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순간에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그 약속이 야곱에게 물려지긴  했지만 그 일을 통해 그녀는  믿음의 선진들의 반열에 들어가는 존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는 본문을 상고하는 모든 독자들이 리브가가 그러한  존귀를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 깊이 살피고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게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 원인은 그녀의 자아가 살아 꿈틀거린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 안에서 부단히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기를 등한히한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녀의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때문입니다(고후 10:5).  그것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을 뵙기 위해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쓰지 않은 때문이며(마 6:6), 그녀의 속사람의 강건함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전략하지 않은 때문입니다(엡 3:16).

   7. 쓸쓸한 말년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보낸 후로 리브가는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아마 리브가는 야곱을 떠나  보낸 후에 자신의 경솔한 처사를  하나님 앞에 뉘우치며 자식에 대한 그리움  속에 쓸쓸한 여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남편 이삭은 병상에 누운 몸이 되었고, 큰 아들과는 장자권 탈취 사건으로 여간 서먹서먹한 관계가   아니었고, 게다가   며느리들마저 심령에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26:34,35). 전날에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족장의 가문의  하나뿐인 며느리로서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누이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는  축복의 고별사를 뒤로 한 채(24:60) 부푼 가슴으로 약대 위에 몸을 싣고 등장하던 그 눈부신 자태는 세파에 쓸려 온데간데없고 잔주름이 패이고 검게 그을린 노안(老顔)에는 광야의 찬바람만 불어왔습니다.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는 이 노년기에 접어 들어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을 필요로 했습니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시 71:9,18). 또한 하나님께도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가까이  하심과 눈동자 같은 보호하심과 친밀한 동행하심과 세세한 인도하심과 그리고 그  온전하고 부족함없는 예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자기를 그녀에게 계시하셨을 것입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3,4)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리브가는 그 노년에 주어진 소생과 회복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 어느 믿음의 여인들보다도 쓸쓸한 말년을 보낸 듯 보이기에  우리의 연민과 동정을 자아냅니다. 그녀는 그 수한을  다 누리지 못하고 그리움과  아쉬움을 남긴 채 일찍  그 열조에게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35:8).

이같이 성경에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없고  그녀의 유모의 죽음만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리브가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거하는  기간에 죽은 듯 보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아마 위에서 지적한 그러한 고독과 그리움으로 그 심령이  깊이 상한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리브가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인물들처럼 그 종국이 그 시작만 못한 인물로 분류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조부 나홀에게서 들은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을 동경하고 생면부지의 배필을 향해  미지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 결연함과,  비록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적어도 그  중심만큼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가치를 잊지 않고 그 실현을 보기 위해  마음을 기울였다는 점은 길이 기억될만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그녀의 그러한 중심을 기억하신 듯, 신약성경의 한 중요한 대목에서 그녀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차지하는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오고 올 모든 세대에게 상기시키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롬 9:7∼13).   <끝>

                                                                                                         글쓴이 : 정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