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bullet07_violet.gif빛을 남긴 여인 - 나오미

 


             
 image/anisquare49_pink.gifimage/anisquare49_bluegreen.gif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새롭게 찾은 여인 - 나오미(Ⅰ)

룻기는 대하면 대할수록 그 은혜의 깊이에 젖어들게 하는 신비한 힘을 느끼게 합니다. 룻,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 이  세 사람은 각기 주어진 삶의 무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그 은혜를  이웃에게 넘치도록 끼칩니다. 그들의  걸음걸음과 몸가짐,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나님의 은혜의 어떠함을 그대로 느끼게 해줍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성도간에서 조차 흔히 볼 수 있는, 뭔가 상응하는 대가를 은근히 바라는 보상심리나, 누군가 알게 모르게 내 명예나 자존심을 훼손시킬 것을 우려하여 조바심과 초조감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잔뜩 웅크리게 만드는 피해의식, 혹은 남보다 더 노력하여  어찌하든지 내 위치와 역할을 드러내어  내 이름을 뭇 사람들 위에 높이려는  욕망에 뿌리를 둔 경쟁의식  등은 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육신에  속한 욕구들은  부끄러워 꼬리를   감추고(엡 5:11,12) 오로지 은혜로운 품행들만 넘쳐납니다. 부단히 상대방의 입장을  취하여 상대의 안녕과 행복만을 위하고, 상대의  심령의 안위와 평안만을 생각하고  염려합니다. 그러한 은혜로운 품성의 열매들은  하나님의 시련의 현장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값진 것임을 이 룻기는 넌즈시 증거합니다.  그것이 인간 편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든, 하나님 편의 계획에서 의도된 것이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로 대응하는 한 , 반드시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 성경과 우리의 경험이 한결같이 증거하는 바입니다(롬 5:3,4).

룻기에는 그러한 은혜와, 그 은혜를 낳게 한 시련의 현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과 그 뒤에 이어진 축복의 과정을  다만 목도할 뿐만 아니라 홀로, 가장 깊이 체험한 여인이 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시간에 등장하여, 자기 역할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데 비해, 이 여인은  홀로 그 모든 장면 장면의 빼놓을 수 없는 주요인물로서, 때로는 전면에서, 때로는 배후에서 시종 그치지 않고 자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을 주목하시기  전에 먼저 나오미에게  눈길을 모으셨습니다.  모압 땅에 잠재되어 있는 은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시기  전에 유다 베들레헴에 축적되어온 신앙의 유산을 보셨습니다. 그 금방이라도 꺼져갈 듯한 희미한 신앙의 불씨가 가져올, 장래의 복스런 기업을 보신 것입니다. 나오미는 축복의 땅 유다를 떠나 버림받은 이방  땅 모압으로 들어간 엘리멜렉이란 사람의 아내로 소개됩니다(1:1,2). 그러한 일종의 현실도피에 대해 그녀는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결정에 순복하여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 몸은 이방 땅에 있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임재가 드리운(비록 희미해졌지만) 유다  땅에 있어 저 시온성을 기억하며 수심에 잠겼었을 것입니다(시 137:1; 느 2:2,3). 또한 날마다 모압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며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벧후 2:7,8). 그 남편이 일찍 죽자 그녀는 그것을 자신들의 그릇된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1:3). 또  두 아들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채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여기며 그저 숙명적으로 그런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1:4).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마저  자식이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1:5).  남은 것이란 세파에 찌들대로 찌든 자신의  볼품없는 노구(老軀)와 가련한 두 이방 며느리들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무기력하고 절망적이고 비통스런 상황인지요! 이제 낯선 이방 땅에서 실의와 향수(鄕愁)에 잠겨 하루하루 연명해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 때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운 고국에 대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1:6). 나오미의 암울한 여생에 한 가닥 서광이 비취었습니다.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1:6). 나오미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징계의 손길을 거두셨으므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그리운 동족들과 더불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비록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비참한 지경이었지만 그  모든 자존심과 인간적인 명분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나오미의 그러한 결행을 지켜보며 힘찬 성원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나오미보다 먼저 그러한 돌이킴과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고 이제 그들의 참 목자 되신 분의 품으로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었습니다(히 12:1). 혹 우리가 나오미와 같은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혹 우리의 거듭된 과오로 삶이 만신창이가  되어 도저히 회복  불가능해 보인다면, 혹  우리의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오미를  비롯하여 우리보다 더 암담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그 믿음의 결말을 본 선진들의 승리의 환호와 우리를 향한 성원의 외침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약 5:7-11;  히 12:1,2).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하나님께서는 이 가련한 여인의 심령에 꺼질 듯 꺼질 듯 가물거리는 믿음의 불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 불꽃에 온기를  더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한 목적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비밀한 섭리 가운데 룻이란 현숙한 이방 여인을 준비하시고 그녀로 나오미의 귀향 길에 동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두 이방 며느리들이 한 소리로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고 고백한 것은 나오미의 시어머니로서의 어질고  자상한 삶을 엿보게 해줍니다(1:10). 그러나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한 룻의 고백은 더  나아가서 나오미의 신앙인으로서의 꿋꿋하고 일관성 있는 삶을 엿보게 해줍니다(1:16).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인간적인 면밖에 보지 못했으나 룻은 그 이상을 보았는데,  우리의 안목이 육정(肉情)의 수준을 넘어 영적인데까지 이른다는 것은 오르바와 룻의 차이만큼이나 우리의 훗날의 모습에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 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에 속한 신령한 일들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하겠느뇨"(마 6:22,23).

나오미는 그의 동족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에 들어간 그 수치스런  피신과, 그로 인해 오히려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비참한  현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초래한 불행이며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녀를 돌이키기  위해 잠시 허락한 징계의 결과임을 철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라고 한 나오미의 뼈져린 자기고백은 그녀의 뉘우침이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진실하고 깊이있는 것임을 엿보게 합니다(1:20,21). 나오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토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모압 땅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을뿐만 아니라 필경 하나님의 백성의 결속력과 사기를 저하시켰을 것이기에 그녀는 동족 앞에서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솔한 선택과 발걸음이 자기 백성에게 미쳤을 부정적인 영향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우리 주변의 믿는  형제자매들은 한 아버지를 모시고 한 본향을 향해 한 믿음과  한 성령 안에서 항해하는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입니다(엡 4:4-6; 히 11:13-16). 우리 모두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나오미와 같이 우리 자신의  결정과 선택하나 하나가 알게 모르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우리의 믿음 안의 형제자매들을 세우거나 넘어뜨리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 나그네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전 8:8-13; 벧전 1:15,16; 5:9; 히 12:28; 빌 2:12)

영적인 회복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기 길을 돌이키는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잠 28:13; 시 32:5,6). 또 그러한 뉘우침과 돌이킴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진실된 자세로 말미암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시 51:6,10).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새롭게 하심을 힘입을뿐더러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데 쓰임을 받게 됩니다(눅 22:31,32).

그러한 참된 회개를 보인 나오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큰 계획을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야의 계보를  잇는 크나큰 특권과 영예였습니다. 그녀가 모압 땅에서  데리고 온 며느리가 그 일을  성취할 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로  하여금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자부"(4:15)인 룻의 극진한 효도로 전날의 아픔에 지나는 위로를 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룻을 통해 아비멜렉의 가업을 잇는 아들을 얻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사 그녀의 이름을 마라에서 나오미로 온전히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알리고, 그 소식을 듣는 모든 이들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소리높여 찬미케 하신 것입니다(엡 2:7,12; 1:6,12).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하고 긍휼히 풍성하신지!(엡 2:4; 약 5:11)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체험한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혜의 향기로 가득합니다. 은혜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한이 없는  호의와 사랑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낮고 어두운데서  가장 높고 빛나는 곳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룻이 그녀에게 낳아 준 아들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이름은 영구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4:15) 그녀에게 임한 구원은 겨우 현재의 삶에 안위와 평정을 약속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오고오는 모든 세대에게 감화와  본을 끼치는 풍성한 구원이었습니다(시 130:7). 우리 모두 그러한 구원을 맛보아 알 수 있기를!  그러한 하나님을 맛보아 알 수 있기를! 그리고 그러한 은혜의 깊이를 맛보아 알 수 있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1:22).

오랜 가뭄으로 보기 훙하게 갈라진 척박한 땅을 등진지 어언 10여년, 이제 다시 찾은 고향 땅에는 누렇게 익어 미풍에 넘실대는  풍요의 바다가 나오미를 맞이했습니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라는 비통한 참회의 몸짓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넓은 들녁을 넘어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이 그녀의 헝크러진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사이 조용히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빰에는 어느덧 뜨거운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받으신 증거가 주위에  가득했습니다. 그녀를 받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심히 깊고 넓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모진 가책과 회오의 몸짓을 멈추고 그 따사로운 아버지의 품에 기대어  감사의 눈물을 뿌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손으로 치시고" "심히 괴롭게 하시고" "징벌을 가하신" 냉엄한 징계의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1:13,30,31).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한 여인의 삶 동안 새겨진 인상이 그런 모습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그분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통스런 귀향여정에 룻을  동행케 하신데는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배려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제 나오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을 여전히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남은 생애를 가치있게 보내고자 하는 고결한 소망이 다시 싹텄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되고 있는 자부  룻의 품행과 거동을 지켜보면서 그 소망이 날로 커갔을 것입니다.

2장은 나오미의 생(生)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 나오미의 삶이 이방  땅에서 얻은 며느리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의지하던 것이 끊기어 아무 살 소망이 없던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잉태하는 힘",  곧 생(生)의 의욕을 얻은  것입니다(히 11:11,12). "내 딸아 갈지어다"라는, 룻을 추수하는 밭에  나가도록 허락하는 나오미의 말에서(2:3)  우리는 자포자기의 한숨 대신에 생(生)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다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추수하는 밭은 전날에 나오미의 생활터전이었는데 이제  그 생활터전을 이방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은 삶은 룻의  생각과 행동 여하에  달려 있었습니다.

룻이 곁에 있다는 것은 지난 괴로운 시절을 상기시키는 피하고 싶은 사실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변치않은 사랑과 은혜를 상기시키는  날마다 생의 의욕을 불어넣는 복스런 사실이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기대에 넘치는 풍성한 은혜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2:18). 하나님의 은혜는 나오미를 넘어 그 이방 며느레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그 풍성한 은혜(2:14,18)에  대한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그 사랑스런  며느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합니다.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2:19)

그 가련한 며느리를  돌아본 자는 다름아닌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2:20). 이렇게 대답한 나오미의 말속에서 우리는 나오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다 깊은 깨달음에 이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용서하고 감싸주고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는 감정적인 치료와 회복을 뛰어넘어  이후의 삶에 대한 전망과 계획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오미는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과거를 치유하는 수준을 넘어 미래를 기약하고 보장하는데까지 이른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계획이 담겨있다는 것이 이 룻기에서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 은혜의 계획에 세 인물, 즉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 나오미의 경우에는 삶의 실패와 그로 인한 시련을 통해 연단을 받은 모습으로, 룻의 경우에는 이방 땅에서 택함을  받은 모습으로, 그리고 보아스의 경우에는 충성스런 청지기의 모습으로-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부터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나오미는 한발 더 나아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3:1) 여기에는 나오미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바램의 여지가 전혀없으며 오로지 며느리의 안녕과 축복만을 기원하는 이타적인 사랑이 넘쳐납니다.  삶의 역경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얼마남지 않은 삶에 대한 세상적인  미련을 모두 떨쳐버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혹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실 은혜가 또 남아 있다면 그 모두를 자신의 인생역정에 동행한 사랑하는 며느리의 축복을 위해 돌리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려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나오미는 남달이 모진 삶의 시련을 겪은터라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그 댓가를 거둬보겠다는 보상심리에서 착한 며느리를 늘 곁에  두고 봉양을 받고싶어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삶의 시련을 대했기에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처신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자신이 한 것이란 온통 돌이키기 싫은 부끄러운 일뿐이었고,  이렇게 늦게나마 고향  땅을 밟고 또  효성이 극진한 며느리의 분에 넘치는 봉양을 받게 된데다 그 이방 며느리조차도 가까운 친족에게 선대를 받는 은총을 입었으니,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돌아보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새삼 깨닫고 마음이 절로 녹아 남은 생애를 다른 사람의 축복을 위해 드리겠노라고 조용히 다짐하고 또 그렇게 자신을 드릴 때 우리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할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는데(3:2-4) 이것은 상식과 통념의 벽을 넘어 여인이 남자에게 청혼을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오미는 게다가 "그(보아스)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는 확신에 찬 언질로  자신의 제안의 실현가능성을 보증하는 대담성을 보였습니다. 또 그러한 대담성은 후에 그 일의 결과를 듣고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확언한데서도 나타나 있습니다(3:18).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용의주도함, 믿음의 담력, 혹은 사람과 사물을 보는 그 깊은  통찰력 등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이제까지 우리가 관찰해 온 나오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하겠습니다.

그러한 용력과 대담함과 예리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들은 나오미의 타고난 성품이나 기질을 뛰어넘는 영적인 성격의 자질들로서 그 근원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나오미는 시련을  통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배우는 기회를 누렸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녀의  영혼 속에 그러한 순전한 담력과 신령한 안목이 형성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이방 며느리가 고향 땅까지 따라온 일과 추수하는 밭에 나간 일, 거기서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의 눈에 띤 일, 그에게서 은혜를 입은 일, 대담한 방식으로 제기된 룻의 청혼을 보아스가 거부하지 않은 일등이 모두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일련의 과정임을 확신하고  이제 부푼 소망과 기대감으로 앞으로 되어질 일을 지켜보고자 했습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3:18).

나오미는 할 수만 있으면 신앙과  인품에 있어 크게 존경을  받는 보아스가 자신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되기를 바랬을 것이나 그렇게 되기에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보아스보다 우선권을 가진 더 가까운 친족이 있어서  그의 선택여하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녀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기에 그녀는 조급해 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일의 결말을 맡긴 채 믿음으로 잠잠히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이 궁극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보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그분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잠잠히 그분의  시간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기쁨으로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믿음의 여인을 보시며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렘애 3:25,26).

이제 나오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이  성취될 시점이 이르렀습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4:13).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이" 본향을  떠나 유리하던 외로운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같이 풍성했습니다(잠 27:8). 이에 모든 여인들 - 창조에 있어서,  가정 및 사회적 입장에 있어서, 그리고 영적인  질서에 있어서 그녀와  같은 성정과 처지와  위치를 공유하는 모든 여인들-이 경탄과 부러움의 눈길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했습니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4:14,15).

여인으로서 아들을 낳아 남편의 가업을 잇게 한다는 것은 모든 평범한 여인들의 근본적이고도 소박한 소망입니다.  나오미는 이방 며느리의  재혼이라는 결코  순탄치 않는 과정을 통해 은혜로 얻은 손자로 인해 극적으로 그러한 소망의 실현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며느리는 고향 땅의 어떤 문벌좋은 며느리보다 자랑할 만했으며 그를 통해 얻은 손자는 어떤 귀한  아들보다 소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4:16). 나오미는  가꺼이 그 손자의 양육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 어미인 룻이 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그 뿌리를  깊이 내린 신앙에 바탕을  둔 교육을 즐거이 떠맡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오미가  어떤 감회를 가지고  그 손자를 슬하에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차근차근 가르쳤을  것인지 그 감격과 기쁨과 보람을 능히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

놀랍게도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고 한 여인들의 축복이 응답되어 그 아이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의 계보 가운데 포함되는 영예를 얻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다윗의 조부였습니다(4:17).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방 모친의 이름도 세세토록 기념케 되었으니(마 1:5) 이는 인류구속의 계획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택하심을 따른 것임을 웅변적으로 증거해 주는 괄목할 기록입니다(롬 9:16; 11:15).

룻기는 이같이 나오미 개인을 무한히 뛰어넘어 인류전체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증거해 줍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혼구원을 통해 그 은혜에 참여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와 같이 삶의 시련을 통해 그  은혜의 깊이를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꺼질 듯 가물거리는  우리의 신앙의 불씨를 보존하고  되살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그분의 자비하신 역사의 손길에  힘입어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 참된  평강이 없음을 깨닫고 돌이킬 때 그 은혜는 전보다 더 벅찬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래와 같이 고백한 다윗과 같은  심경으로 그분의 자비하신 품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삼하 24:14).

그 은혜에 젖어 감격해 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계획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는데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자신 역시 축복을 누릴 것이라고 그분은 조용히 약속하며 힘을 북돋워 주십니다. 모쪼록 그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마음이 부서지고 낮아지고 가난하고 간절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22∼28). <끝>

                                                                                                            글쓴이 : 정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