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bullet_pieces.gif 빛을 남긴 여인 - 주님께서 보시는 두 자매의 신앙 마리아와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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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보시는 두 자매의 신앙 - 마르다와 마리아



                                      


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세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만(눅 10:38-42; 요 11:1-44, 12:1-8) 그러나 그들의 모습과 이름은 많은 성도들의  가슴속에 아주 친숙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매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세 번 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이 깊고 고귀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한 형제로서 한 지붕 밑에 살면서 함께  주님을 뵙고,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서로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주님을 깊이 사모하고, 함께 주님을 섬기는 자매들이었습니다. 또 함께 가정의 우환을 겪으며, 함께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또 함께 주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며 함께 사랑의 수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자매의 주님께 대한 태도와 믿음과 사랑은 똑같지만은 않았습니다. 즉 주님을 경외하고, 사모하며 사랑하는 면에서 이 두 사람은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이런  영적인 차이는 부부간에도, 한 가정의 형제들 간에도, 그리고 모임 안의 학생들, 청년들, 장년들, 자매들 간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즉 어떤 성도는 주님을 더 경외하고, 더  사모하며, 더 사랑하는데 반해서 또 어떤 성도는 그렇지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이 두 자매의 이야기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이야기에서 본 두 자매의 모습(눅 10:38-42)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38-42).

이 이야기를 얼핏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마리아가 더 이기주의적인 것 같고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더 헌신적인 것 같이도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는 집안에 오신 손님들 곧 주님과 그 제자들을 접대하기 위해 분주히 일하고 있었는데 반해서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 손님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함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고 마르다에 대해서는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사실과(시 51:6) 또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한 사실에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삼상 2:3과 왕상 8:39; 눅 16:15도 참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중심 곧 그들의 행동의 동기를 보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즉 마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무슨 일을 분주히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기심에서 온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위한 것이고 주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르다는 주님께 대한 불평이  생겼고, 또 그의 불평하는 말 속에는 '자기'가 많이 들어가  있었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즉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물론 마르다 자신은 정직한 마음으로 자기가 그러한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르나 그러나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이기심이 본능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하여 이르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22)라고 말하게 된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나름대로는 주님을 위해 말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사단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되었으며,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죽음을 각오하지 못한데서 나온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중심을 읽으시는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3-24)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그의 동기가 온전히 순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같이 개인의 이해관계나 사심이 있어서도 안되고 또 베드로와 같이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다가 그 동기와 본심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과 주님께 대한 본의 아닌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즉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하고 주님께 감히 원망과 불평 내지는 항의를 하는 그런 과오를 범했고, 이어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하여 주님께 감히 명령을 하달하는 그런 무례함과 불손한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의  경우와 그 근본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민망해지신 마음으로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두 번씩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고 면책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마르다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관계로 마음에 평안과 안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겠습니까? 그 "많은 일" 가운데는 접대 준비에 관계된 많은 일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마르다가 자기를 의식하고 주님과  동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데서 온 여러 가지 혼란한 생각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되어집니다. 말하자면 마르다는  주님께서 자기의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시고 알아주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데 대한 불편한 생각,  그리고 혼자 애쓰는 그런 자기를 안쓰럽게 보시고 자기 동생을 시켜서라도 "마리아야,  네 언니가 혼자 저렇게 애쓰고 있으니 가서 도와주면 좋겠다"고도 말씀해주시지 않은데 대한 불편한 생각, 그리고 동생 때문에 자기는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 의식, 기타 이런 많은 일들로 마음이 복잡해 있었던 것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가 있도다"(눅 10:42 방주를 참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족한 한가지는  무엇을 가리킨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마리아에 대해 말씀하신 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이 좋은 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이 좋은  편"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마리아가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 한 것을 가리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 그 한가지 부족한 것, 곧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등한히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평안과 안정을 잃고 원망과 시비, 또는 무례와 불손 등 갖가지 육신의 일을 나타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부엌 일하는 것이 싫어서던가, 아니면 언니 마르다가 하는 일을 도와주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주님을 둘러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조바심한 나머지 언니를 도와 부엌일을 할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갈까  하는 이 두가지를 놓고 생각하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마리아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 자라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마음은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마리아가 그 언니가 불평하는 중에도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은 그의 조용한 모습에서 엿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그가 택한 그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축복을  평생토록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주님을 위한 봉사보다 앞서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봉사는  예배의 열매이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매일 매일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무런 대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때로는 가까운 다른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불평과 시비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좋아하시고 또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변호해 주시며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만일 누구든지 마르다와 같이 집안 일에 분주한 나머지 매일 아침에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외면하거나 등한히 한다면 그는 마르다처럼 외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불만적이고 비판적이며 염려와 근심이  가득차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원망하고 나무라며, 심지어는 주님께 명령을 하달하는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이 되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만일  누구든지 마리아와 같이 매일 아침에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는 "이 좋은 편"을 선택한다면 그는 마리아처럼 영적인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주님께 무엇이든 드리고 싶어하게 될 것이며 또 그 향기는 멀리까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로  인해 크게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 이야기에서 본 두 자매의 모습(요 11:1-44)

이 이야기는 병을 앓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나사로는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에 사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다의  오라비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자인데 그 오라비가 중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 누이들이 그 일로 사람을 주님께 보내던 바로 그날 나사로가 숨진 것으로 보아 나사로가 중환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돌려 그들이 이때 어떠한  자세로 주님을 대하였으며 또 주님께서는 왜 그런 시련을 그들에게 허락하시고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살피며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 이 세 남매를 지극히 사랑하셨음을 알게 되고 또 그로 인해 크게 감동을 받게 됩니다.
5절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하여 주님께서 친히 이 세 남매를 사랑하고 계셨음을 보게 되며 3절에는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여 자신들이 그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매우 깊이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6절에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하여 주위 사람들도 주님께서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심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물론 이 마지막의 경우 문자대로는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눈물 흘리시는 것을 보고 마리아를 두고 한 말이긴 합니다만) 뿐만 아니라 11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하여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매우 다정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심에도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친히 사랑하시는 이 가정에게 이런 중환을 허락하셨으며 또 그들이 이런 어려운 일로 마음조리고 있음을 아시면서 또 더욱이 그 전갈을 받으셨으면서도 그 계시던 곳에 그대로 이틀을 더 유하시며 그들의 간구 들어주시기를 지체하셨고 또 그리하여 그 오라비 나사로를 죽도록 하셨으며 또 그의 죽은지  나흘이 되어 그의 몸이 썩어 냄새가 날 때까지 내버려두고(?) 계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질문들을 수없이 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지금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거나 또 앞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오라비의 일을 낙관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친히 사랑하고 계시고 또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주님께서 자기들 오라비의 병도 고쳐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당연히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단순히 아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을 대하는 신앙의 자세에 있어 최소한 표면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보이지 않습니다만 사실은 근본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과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성도면 누구나 흔히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 성장을 위해 꼭 해결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매님들의 주님을 대하는 신앙의 자세에 있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자매님들이 그 병에 대한 주님의 계획(뜻)을 전달받고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으며, 또 주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섭섭해하며 또 주님께서 신실하시게 참고 계속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끝까지 믿지 못하며 불신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마음에 민망히 여기시며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까지 흘리셨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이 많은 거듭된 실수들은 다만 한가지 아주 작게 보이는 원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바로 그들의 본성이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  본성을 가리켜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육신의 기본 성격은 자아 중심적이며 이기주의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곧 육신은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여 판단하게 합니다. 나의 뜻과 나의 원하는 대로 하기를 원하게 됨으로  나의 뜻과 나의 원하는 대로되지 않을 경우 실망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며, 근심하게 되거나 불안하게 되고 초조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연민, 자기 소외, 자기 미움으로 이어져  마침내 자살까지 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나 하나님과 연관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나 그 하나님을 오해하고, 섭섭해하게 되며 원망하며 불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바로 이런 본성을 따라 그 오라비의 일을 주님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전갈을 보내었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한가지의 소원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속히 내려오셔서 그 오라비의 병을 꼭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 앞에 그 소원 밖에는 없었습니다. 아직 그들의 믿음의 안중에는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생각 같은 것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고, 또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가르치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들의  전갈을 받으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이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11:4)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오라비의 병에 대한 그들의 본성적 소원을 따라 그  오라비의 병을 고쳐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 좋은 말씀도 그들에게  아무런 위로나 기대나 의지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이 좋은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마치 "가시떨기 위에"떨어진 씨앗처럼  "세상의 염려…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 13:7,22)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이 본성은 주님께서 그들의 원하는 시간에 오시지 않고 지체하심으로 그 오라비가 죽게된데  대해서도 매우 섭섭한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마르다는 주님께서 오셨을 때 그 섭섭한 마음을 터뜨려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하였고, 또 그 동생 마리아도 같은 원망섞인 말을 했습니다(요 11:32). 이 마르다의 본성적 소원은 계속 그를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마르다는 말하기를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2)라고  하여 표면적으로는 마르다가 매우 훌륭한  믿음을 고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말 역시도 믿음으로 한 말이 아니고 섭섭한데서 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르다는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 1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자기가 방금 고백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라도" "무엇이든지"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고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다를  깨우쳐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다그쳐 물으셨을 때에도 마르다는 여전히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동문서답만 하고 자신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라도" "무엇이든지"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요 11:39)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라고 그의  불신을 노골적으로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고 그의 믿지 못함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무라셨습니다.

이로 볼 때 그들의 이 작은 육신의 생각, 즉 육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했고,  또 주님의 지체하심에 대해 겸손히  주님의 뜻을 헤아려 보고 그 뜻에 순복하려고 하는 대신에 원망스러운 마음을 갖게  했으며, 또 그 오라비의 죽음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그 말씀대로(될 것을  믿고) 잠잠히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에 슬퍼하게 했고, 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여전히 불신 가운데 헤매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하여금 마음으로 민망하고 통분하게,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게 했으니 로마서에 말씀한 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는 말씀이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는 평생,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매우 귀중한 교훈을 받았을 것이니 그 후로 그들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또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잠 3:6).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한 말씀들을 예사로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깊이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주님을 대하는 믿음의 자세를 보면서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자매의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곧 나가서 맞되 마리아는 그냥 집에 머물러 앉아 있었습니다(요 11:20). 표면적으로 보면 마르다는 민첩하고 예의바른 여자같고, 반면에 마리아는 느리고 무례한 여자같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의 발치에 가 앉을 정도로 주님을 깊이 경외하며 존귀히 여기고 있었고(눅 10:39; 요 11:32, 12:3) 또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에도  그는 "급히 일어나"(요 11:29) 주님께로 간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 때에 마르다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깊지 못한데서 온 그의 경솔이  작용했던 것 같이 보이고,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등 그런 그의  조심성이 작용했던 것 같이 보입니다. 혹 마리아는 전도서 5장 1절에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한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2). 두 자매는 주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서로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마주 대하여 뵌데 반하여 마리아는  "그 발 앞에 엎드리어"뵈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존귀하심과 엄위하심을 깨달아 그 발 앞에 엎드리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또 아브라함처럼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하여 몸을 굽혀 대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창 23:7,12).

3). 두 자매는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데 있어서도 차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말을 많이 한데 반해서 마리아는 말을 적게 했습니다(약 1:19; 잠  17:27-28). 여기에서도 마르다의 경솔함과 마리아의 현숙함을 보게 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주님께서는 이 두 자매의 신앙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물론 두 자매가 다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이 무엇이든 그 뜻대로 순복하고자 하는 자세를 취하지 못한 점에서는 똑같이 실패했습니다만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께로부터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 또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는 등 거북한 질문을 받을 정도로 좀 어리석게 행동한데 반해서  마리아는 주님께로부터 그러한 말씀을 들을 정도의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이 보입니다.

3. 세 번째 이야기에서 본 두 자매의 모습(요 12:1-8)

요한복음 12장은(요 12:1-8) 마르다와 마리아가 시련 후에 크게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누가복음 10장(눅 10:38-42)과 요한복음 11장(요 11:1-44)에 나타나 있는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요!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해 있어서 즉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있어서 불필요한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함으로 주님께 실언을 하고 무례를 범하는 등 여러 가지 실수를 하고 있고, 요한복음  11장에서는 그 오라비의 일로 주님을 원망하며 불신함으로 주님을 민망하게 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의 마르다는 완전히 탈바꿈을 한 모습입니다. 마르다는 더 이상 마음이 분주해 있지 않습니다. 원망과 시비, 또는 질투와 시기로 인한 염려와 근심 또는 불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련으로 인해 새로이 경험하고 주님으로 인해 온전히 새로워진 마음, 즉 주님께 온전히 매료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우아한 모습입니다. 즉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요 12:2) 한 말씀이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시련 전의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잔치해 주기만을 구하는 마치 자기에게 잘해 주기만을 구하는 마치 자기에게 잘해 주기만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이기주의적 신앙을 가진 마르다의 모습이었으나 시련 후 지금의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마치 철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듯 주님께 효도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입니다. 시련 전에는 육신의 정욕에  끌려 육신에 종노릇하던 마르다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감동된 마음으로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고후 5:14). 즉 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던 마르다가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보잘 것 없는 자기들과  자기 오라비를 사랑하사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도 시련 후에  그로 인해 새로이 경험하게 된  주님으로 인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요! 마리아의 마음에  새로이 비친 주님의 위엄스러움과 지극히 높으시고 존귀하심이 그녀를 온전히 뒤흔들어 황홀하게 만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요한복음 12장의 현숙한 마리아가 되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서 그 오라비의 일로 그의 믿음의 자세가 조금 흔들리긴 했으나 주님이 부르신다는 말씀에 급히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겸허히 나타내고 있는 것도 아름답지만, 그러나 그 모습은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11장의 마리아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주님을 대하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는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자기의 모두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가 "마리아를 위한  주님" 즉 마리아가 자기를 위하여 주님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라면 후자는  "주님을 위한 마리아" 즉 마리아가  주님을 위하여 자기를 드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요 12:3) 함과 같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주님은 이렇게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께 아무리 최상의 것을 드린다해도 아까울 것이 없음은 물론 부끄럽고 미흡하게 여겨질 만큼 주님은 무한히 존귀하신 분이셨습니다. 상대적으로 마리아는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들어 그 존귀하신 분을 똑바로 쳐다보기에도, 그분 곁으로 가까이 가기에도 송구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심히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감당키 어려운 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그분께는 진정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져 주님의 신체 중에서 가장 낮은데 있는 발 곁을 찾아가 그 발에 그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여자의 영광인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지극한 경외심으로 자기 소유 전부와 자기 자신 전부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 마리아의 주님께 대한 경외심은 사도 바울의 주님께 대한 경외심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위해 로마 옥중에 감금되어 온갖 육체적 불편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고 하였고, 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받는 시련이나 고난은 우리에게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유익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련 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경험하게 되어 우리의  믿음이 자라 굳세게 되며,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받는 시련이 우리를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나 마르다, 또는 나사로와 같이 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고,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게 만들며, 자신의 전부를 드려  주님을 사랑하게 한다면 우리는 환난과 시련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또 그로 인해 슬퍼하거나 근심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받는 여러  가지 시련이 우리에게 인내심을 길러주며, 원만한 인격을 만들어주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바라보게 해준다면(롬 5:2-4; 약 1:2-4,12)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계기가 되게 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또  환난받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면(고후 1:3-4), 또한 우리의 받는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 교훈의 가치를 알게 하고(시 119:72)  그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복임을 깨닫게  하여 그렇게   살게 해준다면(시 119:67,71,75, 73:27-28) 우리도 우리 믿음의 선조들처럼 환난 중에도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욥 1:20-22; 시 119:61-62; 행 16:24-25; 롬 5:34; 골 1:24). 또한 우리의 잠시 받는 시련의 경한 것이 장차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면(고후 4:17; 롬 8:18),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준다면(벧전 1:7)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할지라도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고후 4:16). 이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그러면 마르다와 마리아 그 오라비의 일로 즉 그 시련으로 인하여 무엇을 배웠기에 그렇게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들의 배운 것은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존귀하심을 새로운 면에서 배우게 된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의 비천함을 새로운 면에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그 전에 주님의 존귀하심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지식만으로는 주님을 합당하게 잘 예배하며 섬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오라비의 일로 주님은 단순한 훌륭한 선생만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아들"(요 11:4) 곧 그 신분이 하나님이심을 새로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께  아무 것도 아닌 자기들 삼남매를 사랑하사 자주 찾아주시던 일과 또 그 오라비의 일까지 마음을 써 주사 이틀이나 걸리는 그곳(베다니)까지 오셔서 단지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요 11:44)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만드는 등 그 위엄스러움을 보았을  때 그들의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경외심은 그들의 남아있는  모든 자아와 자존심을 송두리채 삼켜버리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주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도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바울 사도도 그의 선민의식과 종교적 지위, 경력 또는 공력으로 생겨난 그의 자만심과 독선적인 마음을 스스로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영광스러운 주님을 뵈었을 때 그 모든 것은  그에게 배설물처럼 보였던 것입니다(빌 3:4-9).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인가요? 엘리사의 스승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홀연히 승천해버린 후 혼자 남은 엘리사가 요단강 언덕에 서서 요단 강물을 쳐다보며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왕후 2:14) 하고 엘리야의 하나님을 찾듯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 계시니이까"하고 주님을 새로운 면에서 뵈올 수 있도록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 119: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요한복음 20장에서 주님을 잃은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찾을 길이 막막하여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그냥 울고만 있을 수 없어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보기도  하고, 또 거기에서 만난 흰옷입은 두 천사에게 자기 사정을 하소연 하며 주님을 찾았을 때 주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사 말씀을 건네시며 "마리아야"하고 이름까지 불러 만나주시던 주님을 바라다 보십시오!(요 20:1-18) 그리고 주님을 만나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가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요 20:18)고 간증한 것처럼 우리 중 많은 사람도 그런 간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박 준 형